내 죽음 우리 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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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회갑이었을 때였으리라. 내 노인학교의 총무 남편이 향년 75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났다. 그런데 총무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닌가? 화장장에 가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참 고인도 내 제자(노인 학생)였다.

다음 주 토요일 오후 수업 시작 전, 120여 명의 학생들에게 고인을 위하여 명복을 빌자고 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각양각색의 자세나 몸짓으로 중얼거렸다. 각자의 종교가 다르니까.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천리교….워낙 섬뜩해서(?)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학생들은 셋이나 되는 무당(巫堂)이었다. 그들의 그 모습을 어찌 거기서 묘사하랴. 그래, 그만두기로 하자.

18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거의 다 이승을 떠났으리라. 당장 연락이 되는 딸이나 아들 혹은 며느리도 없다. 내가 노인 학교로선 유례를 찾기 힘든 ‘생활기록부’까지 만들어 활용했으나, 그것마저 없어진 지 오래라 집 전화번호도 알 길 없는 거다. 하기야 덕천1동 경로당에 들른다 치자. 아직도 생존해 있는 노인 학생이 있을는지 모르겠다만….허무한 소식뿐일 것 같아,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총무 남편이 기세(棄世)를 했을 때 난 혼잣말을 했다. 나? 뭐 일흔만 넘기면 원도한도 없겠다고.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로부터 지금까지 내 삶은 사투(死鬪)와의 전쟁 그 자체였다. 아니 그 전에 나는 이미 중병(重病)에 걸려 있었다. 죽었다는 소문 즉 ‘왼소리’는 내 귓전에까지 마구 파고들었다. 70명이 넘는 의사가 속수무책!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

중언부언하지만, 그 시한(?)까지 아슬아슬한 고비는 수없이 많았다. 그래도 나머지 20년 가까운 세월, 거짓말처럼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왔다. 더구나 그 절반은 천리타관에서다. 기억을 곱씹을수록 요행(僥倖)이라는 안도감보다 수수께끼보다 더 수수께끼 같다는 의아심이 앞설밖에.

이제 유해(遺骸)로 진화(?)하여 귀향해야 할 시기가 가까이 오는 것 같아,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때론 짐짓 여유를 부린다.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이 좋다. 더 나아가 보자. ‘시작이 반’이라고도 했지? 이렇게 별로 죽음이 두렵지 않음을 다짐하기도 한다.

딱 하나. 발목을 잡는 게 있긴 하다. 우리 부부가 낮 시간 아니 밤에도 보살펴야 하는 손자 둘이다. 노파심 아니 과욕으로 말미암은 한갓 허영일지 모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녀석들이 좀 더 자란 뒤까지는 하느님이 우릴 부르지 않으셨으면….하지만 코로나가 문제다.

하여튼 목적지는 밀양시 삼문동 밀양 성당 천상낙원(天上樂園), 봉안당이다. 물론 아직 가계약(假契約)도 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 어느 교우에게 전화 넣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물론 이 ‘코로나 19’가 자취를 감추면, 밀양 행 완행열차를 탈 작정이다.

밀양 성당 천상낙원에는 생각만 해도 나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하시는 아버지와 엄마가 누워 있다. 그리고 같은 방 마주보는 공간에 내 사돈 내외가 영면에 들었고. 사돈 내외는 부산 교구에서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존경을 받았었는데,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거기 찾아 들어 편히 쉬고 있다. 그에 비하면 엄마와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가 나이었지만, 나와 아내가 영세를 했기 때문에 거기서 안식을 누리게 됐고….엄마 아버지에게 효도한 것은 그게 유일한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자신이 생각해 봐도 난 희한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팔자가 그런 건지 모르지만, 끈질기게 이런 화두(話頭)와 어깨를 겯고, 그럴 때마다 쓴웃음을 알게 모르게 날리곤 했으니까. 오늘은 근래 앉으나 서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앞서 들먹인 바도 있는 죽음이나 무덤(묘지 혹은 유택, 봉안당)에 얽힌 단견(短見)이며 회억, 소감 등을 털어내 보이고 싶으니 어쩌나. 워낙 외곬이라, 나를 과신한(?) 나머지 행여 거기 섞인 편린(片鱗)들이 마치 기록이라도 되는 양 착각할까 싶다. 아무튼 토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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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이나 그 근교 어느 도시나 지역사회에 위 상(上)이란 개념을 적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경(上京)’도 글이나 말에 쓰지 않는다. 처음엔 헷갈렸지만 지금도 부산에 갔다가 다시 기차나 버스를 탈 때, 행여 ‘올라간다’라고 실언할까 봐 무척이나 조심할밖에. 따라서 ‘하부(下釜)’도 내 사전에는 없다. ‘하밀(下密)’은 더더구나 어림없고말고.

서울을 ‘상(上)’으로 대접하는 건 언어도단이다. 단지 위도(緯度)가 높고 낮을 뿐이지 않는가 말이다. 한데 무의식중에라도 어느 누가 그런 데에 습관화됐다 치자. 그는 비난을 받아야 한다. ‘태풍의 북상’이나 ‘상행열차’ 따윈 모르겠다만….그것들은 무생물이고, 우린 사람이니까. 그러니 지방의 장삼이사도 거꾸로 서울시민을 폄훼한다. 서울깍쟁이, 서울내기, 다마내기(양파), 맛좋은 고래개기.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데! 󰁕서울이란 요술쟁이 찾아갈 곳 못 되더라󰁖 ‘앵두나무 처녀’라는 흘러간 옛 노래가 아직도 노래방에서 인기를 누린다.

근데 그러니까 용인에 온 이후 약간 위 ‘상(上)’에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됐다. 예를 들어 밀양 천주교 천상 낙원 ‧ 할머니와 큰아버지 내외 ‧ 종형 산소, 청도 한재 외할아버지 산소를 참배할 땐 올라가지 내려가지 않는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이나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몇 군데다), 유토피아 추모관, 영천 호국원, 4‧19묘소 등등도 마찬가지다. 참, 내 소설의 스승인 고 이규정 교수와 구인환 교수도. 거기는 내게 ‘저 높은 곳’이지 않는가?

거기서 큰절을 하면서 거기 누운 주인공의 영혼은 분명 하늘에 있다는 떨치지 않는 거다. 하늘은 땅보다 높지 않은가! 그러나 어쩌다가 실기(失期)해버린 적군 묘지는 예외다. 거긴 평평할 ‘平’ 한 자를 들고 찾으리라. 임실호국원 및 대전 현충원에는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참 많은 유택 혹은 산소, 봉안당 등을 참배했다. 따라서 혼자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그 일에 극성을 부린 게 한갓 예사로운 일로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예외 없이 교만하고 어리석은 고백이지만 말이다.

손가락으로 꼽으면서 들먹이니, 먼저 동작동 국립 현충원이다. 그중에서도 채명신 장군 묘역에서 흘리던 눈물은 아직도 나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는 착각을 내게 준다. 세상에 별을 세 개가 단 장군이 유언했단다. 자기가 죽거든 병사(兵士)들 곁에 묻어 달라고. 입구에서 가까운 데 위치해 있어 찾기도 쉽다. 거기에 가서 난국화 몇 송이를 놓고 거수경례를 올려붙인 다음 ‘전선야곡’을 부른다. 그 수많은 장병들의 묘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참이나 올라가면 마침내 장군 묘역이 나온다. 옛 사단장 두 분의 묘역(묘와 봉안당)에 다다르면 그날의 일정은 끝난다.

물론 군데군데서 진중가요며, 군가, 가곡 등을 목소리에 담아 뿌린다. 어느 병사의 묘비 앞에서 나는 ‘비목’을 목메 불렀다. 이어서 ‘현출일 노래’! 같이 간 동료 기자가 영상으로 담는 가운데, 내가 끝맺음한 말은 이거였다.

“국민 여러분! 저는 50여 년 전에 제대한 예비역 하사입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넋을 기린다면 ‘현충일 노래’는 날마다 불러야 합니다. 현충일 추념식 때만 임들을 찾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현충일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임들은 죽어서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겨레와 나라를 위하는데, 우리는 겨우 1년에 한 번만 그들의 넋을 기리는 게 아닐까요?”

그러고 나서 ‘현충일 노래에 목이 멘 것이다. ‘국민 여러분’은 좀 지나쳤다며 두 기자(예비역 중령과 예비역 병장)가 웃었다. 편집했음은 물론이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하긴 했다. 노래를 재현해 본다.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이름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멸(不滅)하는 민족혼의 상징/󰁖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임들은 불변하는 민족혼의 상징/날이 갈수록 아아 그 충성 새로워라󰁔”

현충원과 관계있는 내가 보기에 가장 슬픈 이야기를 아래에 적는다. 먼저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보자. 휴게실이 있다. 거기 눈길을 끄는 한글 궁체의 붓글씨가 액자 안에 들어가 있다. 여기 옮긴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敵)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머니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어제 내복을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 저는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서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또 쓸 태니까요. 그럼./ 일천구백오십년 전사한 학도병 이의근의 편지를 들길 이길자 씀

 

물론 편지 내용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도록 만들고도 남는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총질을 주고받고 그 긴박한 상황에서 십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戰果)를 올린 것은 통쾌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학도병은 내복 수의 옹달샘 상추쌈 등을 떠올리면서 엄마에게 이별의 편지를 쓴다.

한데 여기서 우리나라 위정자 내지 보훈 관계자들이 얼마나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고발해야 하는 게 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의근? 그 이름조차 틀렸다. 이우근이 맞다. 내가 그의 모교 동성중학교에서 확인한 결과다. 붓글씨도 그렇게 빼어난 게 아니어서 그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태니까요’가 뭔가? ‘테’지. 도대체 왜들 이렇게 무관심한지 슬프다.

작년 6‧25 69주년 기념식 취재 차 갔는데, 이 편지는 그대로였고 이름 또한 고쳐지지 않았다. 보훈처장에게 부아가 치밀어 올랐고말고. 또 있으니, 이거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를 두 가수가 불렀는데, 그 또한 음정이 틀리더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을 두고 하는 말이다. ‘친’이 계명으로는 ‘레’인데, ‘미’로 눈 하나 깜짝 않고 얼버무린 거다.

기어이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것이 나의 결심이다. 언젠가 내가 불렀으면 한다고 결심했다. 깜냥이 되느냐고? 건방진 얘기지만, 난 프로야구장에서 애국가 독창까지 했으니 나더러 깜냥이 되느냐고 의아심을 갖는다면 그가 그르다. 윤항기 목사에게도 그 이야길 당일 했다. 그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도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임들을 향한 내 단심(丹心)을 적어서라도 남겨 놓고 싶다. 해서 난 기다린다. 현충일과 6‧25날을!

내가 여기서 찾는 또 다른 묘원은 용인 천주교 묘원이다. 김수환 추기경과 노기남 대주교의 묘소에도 들렀다. 그 앞으로 많은 사제(司祭). 즉 신부와 주교, 대주교들이 누워 있었다.

그런 뒤 심심하면 난 아내나 사위와 함께 천주교 묘원에 발걸음 했다. 이상하게도 거기 가면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걸음을 멈추고선 복음 성가를 봉헌했다. ‘살아 계신 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방황하는 나그네’, ‘바람 속의 주’ , ‘주여 이 죄인이’ 등등.

얼마 뒤 우리나라 최고의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교수가 선종하여 묻혔을 때도 거기 들렀다. 부인 한말숙 원로 소설가(예술원 회원/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와의 교유(交遊)도 그래서 시작되었고. 몇 달 뒤 최희준도 그리로 왔다. 그 앞에서 ‘맨발의 청춘’ ,‘ 하숙생’ 등을 열창하면서 그를 그렸다.

한국소설가협회 카페에 회원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부음을 자주 올라온다. 그걸 보고 장지가 어딘지 자세히 알아본다. 만약에 그가 가톨릭 신자라서 용인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했다 치자. 빈소나 영안실로 문상을 가기가 힘든 처지라, 며칠 뒤 용인 공원묘지를 찾는다. 이정은 부이사장의 부군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들을 만나러 오는 건 일상이다.

내가 소설을 사사(私事)한 두 교수가 선종한 뒤 영면에 든 곳은 수원과 서천의 공원 묘원과 가족 묘지다. 동백역에서 기흥, 수원 등에서 지하철을 환승하여 수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서 이규정 교수와 해후(?)했다. 같이 부산에 살 때, 정말 많은 걸 그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선종 얼마 전에 신도림역에서 전화를 냈더니, ‘주 날개 밑’을 불러 달라고 그가 내게 청하는 게 아닌가? 곁에 승객들이 붐비었지만, 목소리를 높였다. 󰁖주 날개 밑 내가 편히 쉬리라/ 어두운 이 밤에 바람 부나…󰁖

구인환 교수 생전에 그의 자택을 방문한 적이 있다. 몸이 많이 아플 때였다. 개신교를 믿는 어느 자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둘 앞에서 ‘살아 계신 주’를 봉헌했다. 󰁖주 하느님 외아들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그럴 경우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분이 없다. 셋은 그 ‘살아 계신 주’를 봉헌했다. 그가 선종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왕복 400킬로미터 되는 서천의 산소에도 택시로 다녀왔다.

내게는 정말 눈물 없이는 못 가는 데가 유토피아 추모관이다. 거기 봉안당에 내 1촌 혈육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그를 임이라 부른다. 울면서 몸부림쳐도 임은 대답이 없다. 기도를 바치고 성가(聖歌)를 불러도, 임은 손을 내밀지 않는다. 가로막고 선 손바닥 만한 유리창을 어루만지면서 이별을 고해도 임은 아무 반응이 없다.

또 다른 님(임)이 그 이웃에 머물러 있으니 약간은 위로가 된다. 그 임은 내 장모다. 임은 기독교 신자였다. 두 임!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이 되기라도 할까? 모르겠다. 주님은 한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야 한다.

복음 성가는 이승과 저승, 이 임과 저 임을 연결시켜 주는 매체다. 내가 부천 경찰방송이라는 개신교 방송에서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도 그 당위성을 유토피아 추모관(追慕館)에서 얻는다. 돌아 나오면서 파라솔 밑에서 두 임의 넋을 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고는 내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곳이 있다.

교우 신해철 아우구스티노(내 세례명과 같다)의 위령탑 앞에서 서서 고인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몇 마디 던지기도 한다. 물론 묵주기도를 바치고. 왕년의 액션 스타 장동휘도 특별실에서 잠들어 있다. 펼쳐져 보이는 성경 한 구절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최요삼 전 세계 챔프도 마찬가지. 그는 뇌사 상태에 빠지자 장기를 기증하여 여럿의 목숨을 건졌다. 오래 전에 사체며 장기 기증을 약속해 놓고서도 아직 실천(?)에 옮겨지지 않은 내 안타까움을 그에게 토로한다. 이심전심? 글쎄 그가 알아 알아챌는지….

특별한 친구가 있으니 박상철이다. 그냥 친구라 부르는 게 아니라 나는 그를 진짜 친구로 여긴다. 나이가 같은 데다 그가 이승에 있을 때 크게 히트했던 ‘조약돌’은 내 애창곡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4월 1일이 그의 기일이다. 한 달 남짓이면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그의 부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MR 반주에 맞춰 그의 부인 앞에서 ‘조약돌’을 열창(?)하고 싶다. 팬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게 아니니 가능한 일이리라.

다른 많은 저명한 학자와 연예인들도 있으나 다 적을 수 없다. 그 많은 인사들의 정보나 업적 혹은 참고 사항은 이상주 상무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다. 그와 인간관계가 그르쳐지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다.

안중근 열사의 순국 기념비를 참배함으로써 거기에서의 일정을 마감한다. 그 조형물을 세워 준 유토피아 추모관 관장이 고맙기 이를 데 없다. 안중근 의사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진 가톨릭 신자였다.

역시 코로나가 한사코 앞을 가로막고 있다. 다녀온 지 오래다, 4월 29일 다시 오마고 했던 약속을 어쩐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고 분하다. 나는 울부짖는다. 코로나, 사탄!

코로나는 이처럼 나의 모든 일상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타관 객리에서 보내는 중 어쩌면 마감의 하나 성취동기로 받아들여야 할 또 다른 여러 군데의 묘소 참배인데, 코로나가 저렇게 횡포를 부리다니 울화가 터진다. 때로는 미칠 것만 같다. 그래도 희망을 갖고 몇 군데 묘역(현충원 등) 혹은 묘소(묘지)를 머릿속에 그려 본다.

먼저 대전 현충원이다.

이재수 중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나는 버릇대로 허풍을 떤 게 마음에 걸린다. 그가 대전현충원에 묻혔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에 다녀온다고 큰소리친 거다. 그 전우 앞에서 ‘육군가’를 부른다는 각오였다. 육군가! 내가 제대를 하고 나고 50년 가까이 지내서 배웠으니, 그 또한 까닭을 모르겠다. 한 번 불러 본다. 󰁓󰁕 백두산 정기 뻗은 삼천리강산/ 무궁화 대한은 온 누리의 빛/ 희망의 빛 줄 타고 자라난 우리/ 그 이름 용감하다 대한 육군…󰁟󰁖

 

다만 교통편이 좋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어왔는데, 작금에 이르고 말았으니 부끄럽다. 왕복 다섯 시간 남짓이면 가능한데…. 더구나 거기엔 어느 재외(在外) 작가의 선대인도 잠들어 있어서, 그의 유택을 참배한다는 결심을 한 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천안함 순군 용사들도 수십 명 거기 잠들어 있지 않은가? ‘해군가’를 배운 명분도 세우고 싶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행히 대전에 내 전우도 있고 <실버넷 뉴스> 기자도 산다. 죽어도 잊지 못할 내 모부대(母部隊) 전 26사단장 양병희 장군이며, 내게 마흔 시간의 안보 강사(무료) 기록(?)의 기틀을 마련해 준 김동률 대령도 한남대학교 학군단장이 있는 고장이다. 뿐만 아니라 <실버넷 뉴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육장 출신 구항오 기자도 나를 기다린다.

코로나가 물러나면 제일 먼저 찾을 곳이 그러니까 대전 현충원이다.

다음은 임실 호국원. 고인이 되었지만, 내가 <실버넷뉴스> 편집국장과 일산 요양원까지 가서 세 시간 동안 취재했었던 금사향 가수가 영면에 든 곳이다. 왜 그가 호국원에? 그만한 까닭이 있다. 그는 전쟁 중에 군예대(軍藝隊)에 몸을 담아 장병들을 위문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국에서 그를 호국원 영면을 배려한 거다.

내게 색소폰을 가르쳐 주는 조이실용음악학원 원장이 임실(지금은 전주?)의 향토사단 군악대 병사 몇몇이 도와 줄 테니, 거기 가서 고인의 애창곡을 불러 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권한 적이 있었다. 나야 뭐 길길이 뛰며 좋아했고말고. 억지로 코로나에게 덤터기라도 씌워야겠다. 만약 모든 게 풀린다면 나는 금사향 가수가 용인 문화 회관에서 공연을 할 때, 대기실에서 같이 연습하던 ‘임 계신 전선’을 목청에 싣고 싶다. 물론 남자 키에 맞춰야 한다.󰁗 태극기 날리며 임을 보낸 새벽 정거장 기적이 울었소/ 만세 소리 하늘 높이 들려오던 밤/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지금은 어느 전선 어느 곳에서…󰁖

 

금사향 가수가 지하에서 앙코르를 청할 테니 그때는 ‘홍콩 아가씨’다. 문화회관 무대에서 작은 의자에 앉은 채 큰 태극기를 흔들며 열창하던 노(老) 가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빠뜨릴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수유리 4 ‧ 19 묘지다. 지척인데 말만 앞세우기에 서두르는 내 성격 탓에 너무 늦어버렸다. 몇 달 전에 소천한 김병총 형님, 서울 근교에 옴으로써 때로 만나고 때로 식사도 같이 했던 소설가협회의 최고위원. 그와의 만남 자체가 내게는 하나의 은혜였다 해도 과언 아니다. 내가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면 그는 거기에 대처(?), 아우라 불러 주고 반드시 하대(下待)를 했다. 그런 그의 인정 넘치는 모습이 그리울 뿐이다.

내가 실제로는 알지 못하는 동년배의 열사(烈士) 한 사람도 꼭 찾아봐야 한다.

나 자신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가거도(可居島)란 국토 최 서남단의 섬에서 태어났던…. 3년 전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를 냈을 때, 거기 중편(中篇)도 한 편 끼워 넣었는데, 작중(作中) 살인죄를 저지른 주인공이 도피한 곳에 거기였다. 거기에서 요행히 살아남았다가 빈전(反轉) 끝에 누명이 벗겨지고 귀향한다는 얘기다. 주인공은 광주를 거쳐 목포에서 발동선을 타고 가거도로 숨어든다. 죽인다고 주머니칼로 찌른 아기는 가벼운 상처만 입고 살아났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가거도에서 허송세월을 한 주인공이 나 자신이다. 왜 월하빙인(月下氷人)이란 고사성어가 있지 않은가? 그걸 아는 사람이라면, 읽지 않아도 대충 흐름은 짐작하리라.

참 열사의 이름은 김부연이다. 그는 목포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라벌 예고에 재학 중에 4‧ 19 혁명에 참가했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1942년생이니 나와 갑장이다. 코로나만 물러가면 단 몇 시간 만에 다녀올 수 있으리란 기대가 조급증으로 바뀌었다. 현지 취재를 못 한 대신 그곳 초등학교 분교장(分敎場) 부장 교사, 통장 등과 자주 통화도 하곤 했었지.

자, 이제 내가 가봤으면 하는 마지막 묘지는 ‘적군 묘지’다. 우선 구상 시인이 1956년 <자유문학>에 발표했던 시(詩) ‘적구묘지 앞에서’부터 감상해 보자.

오호 여기 줄 지어 누워 있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이하 생략)

 

그의 딸이 우리 협회 소속 작가다. 그 작가와는 인사도 나누지 못했었지만, 뭔가 통할 것 같다. 실은 전국 묘지를 찾고 싶은 욕심은 26사단 12* 기보대대에 안보 강연을 나갔을 때부터 싹 텄었다. 멀지 않은 있다 해서 한 번 발걸음해 보라 싶었던 거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런 사연도 있다. 조갑제 기자가 부산일보사에서 강연을 할 때였다.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거기에서 개막 전에 진중 가요를 일고여덟 번 불렀다. 그런데 거기에서 두 시간 동안 유튜브 방송을 하는 예비역 중위가 대(對) ‘적군 묘지’ 시각은 완전 부정일변도였다. 그때에는 그의 견해에 박수를 보냈건만, 정작 적군 장병들이 죽어 누워 있는 묘지가 바로 거기란 생각이 나를 밤낮으로 몸부림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른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꾀죄죄한 차림 그대로 적군 묘지를 한 바퀴 돈다. 그러다가 햇볕도 덜 들고 잡초가 무성한 어느 무명의 적군묘지 앞에 선다. 그리고 폐부 깊은 곳에서 이 노래를 뿜어 올려 흩뿌리고 싶은 것이다. ‘꿈에 본 내 고향’.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저 하는 저 산 아래 아득한 천리/ 언제나 외로워라 타향에서 울던 몸/ 꿈에 본 내 고향이 마냥 그리워…󰁕

 

그 앞에서 상념에 젖고 싶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전쟁을 일으킨 수괴(首魁)가 시켜서 총을 잡았고, 탄우를 뚫고 공격 혹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총알 하나가 심장을 꿰뚫어 숨을 거두었을 뿐이다. 그들도 엄마가 있었고 그 엄마는 자식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었을 것이다. 정화수는 남에도 북에도 꿇어앉은 엄마의 두 손 앞 장독대 위에 얹어 있었을 거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 달라거나, 영상으로 담아 달라는 부탁을 남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적군 묘지에서 가슴을 열수 있는 유일한 인도(人道)의 한 조각이겠거니 하는 그런 착각인들 왜 안 가졌으랴. 나는 가수니까. 더더욱 국립현충원에서 ‘전선 야곡’이며 ‘전우야 잘 자라’, ‘삼팔선의 봄’, ‘비목’, ‘진짜사나이’, ‘행군의 아침’, ‘육군가’ 등을 어마어마하게 부른 예비역 하사가 아닌가. 내가 설사 전장(戰場)에서 뒹굴거나 부상을 당한 적은 없어도 말이다. 이우근 학도병만큼 가슴을 아프게 했겠냐만, 그 적군들 중에서도 자기 엄마에게 그런 편지를 써 놓고 부치지 못한 친구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꿈을 당분간은 접기로 했다. 파주 시의회에서 적군 묘지 존재 의미를 어쩌고저쩌고 하는 마치 기리기라도 하는 듯한 행사를 치르는 바람에 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것. 그래도 그런 아니다 싶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 나야 후자이고도 남으니 그 정체성을 어찌 버리랴. 코로나가 쫓겨나면 나는 가서, 오직 하나의 선물 ‘꿈에 본 내 고향’만 나지막이 깔고 오리라. 꽃? 아서라, 한 송이도 안 놓는다.

-3-

다시 한 번 부르짖지만 코로나 탓에 삶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타관에 겨우 정을 붙이고 몇 년을 지냈는데, 절망에만 사로잡혀서 반항심조차 생긴다. 하나 어쩌면 이게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귀향! 그게 바야흐로 아내와 나의 요 며칠 새의 화두다.

그러나 살아서가 아니라 이승을 떠난 뒤 유해로 가로 세로 30센티미터쯤 되는 안식처가 있는 밀양의 천주교 성당 하늘공원에서 영원히 잠든다는 얘기다. 밀양! 거기에 아내와 내 유택을 마련하고 싶은 거다. 누가 먼저 숨을 거둘지 모르지만, 뭐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나란히 눕기만 하면 되는 거다. 엄마 아버지 두 분이 누워 있는 그 306호실 어느 자그마한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그 전에 몇 가지 할일.

둘 중 누가 죽으면, 지체 없이 유토피아 추모관에서 내 두 ‘임’의 유해를 밀양으로 옮기는 게 급선무다. 물론 딸 내외와 의논이 되어야 하겠지만, 부모의 유언을 뉘라서 거역하랴. 그동안 미뤄 놓았던 걸 밝히련다. 내가 숨 거두면 연락해야 할 데 열대여섯 곳? 따로 적어 벽에 붙이기 시작한다. 아흔일곱 살 이근양 장군을 취재하러 갔을 때 그 삶의 정리 방법을 배운 거다.

그러니까 말이다. 엄마 아버지와 사돈 내외가 마주보고 있으니, 엄마 아버지 쪽 그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위치에 유택 다섯 개를 마련한다는 뜻이다. 사돈이 달갑지 않게 생각할지라도 내 사정을 이해하게 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작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없이 편한 것이다. 엄마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임’이 가까이 오는 사실만으로도 두 분은 행복할 거다. 우리 둘 또한 마찬가지. 더 이상 슬퍼하지도 않고 고통을 느끼지도 않은 그 안식처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다. 임들과 나란히 누워 잠들고 싶은 건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지상정이다.

왜 밀양 성당이어야 하는가? 또 다른 기나긴 사연이 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재작년 나는 영천(永川) 호국원에 갔다 온 적이 있다. 종형(從兄)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해 지나서였다. 내가 65년도에 두어 달 동안 훈련을 받은 부관학교가 있던 곳이다. 난 종형 내외의 부음을 듣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그와의 여러 가지 추억을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그는 군에 입대했었다.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때, 한 번은 그가 휴가를 왔는데, 사진 한 장을 누나에게 주고 갔는데 군복을 입은 거였다. 그가 귀대하고 난 뒤 그 사진을 보고 부르던 노래가 이거였다. 󰁖쓸쓸한 침대 위에 나 홀로 누워/ 한 손에 사진 들고 두 눈에 눈물/ 이와 같이 잘날 낭군 군에 보내고/ 나 홀로 긴긴 밤을 어이 새우나󰁖

 

그로부터 세월이 흐른 뒤에 아버지가 기세를 했다. 예순을 겨우 넘기고 나서였다. 고향 단장념 국전리를 멀리 떠나 삼랑진에서 몇 년 외로운 삶을 살다가….엄마도 5년 뒤에 아버지를 따라 갔다. 산소는 고향 집에서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무푸롱골 우리 산밭 곁의 언덕배기에 마련했다. 하지만 내가 부산 시민이 된 후론 산소 가기가 참 힘들었다. 금곡동에서 구포까지는 기차, 밀양에 내려 택시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야 한다. 거기서 다시 털털거리는 시골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종점에 하차하여 걸어서 50분….역순(逆順)으로 귀가해야 했고.

근처 산사태가 나서 산소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굵은 나무뿌리가 지탱해 주어서 20년 넘게 버텨냈다. 그러는 중 나는 항상 아팠으니, 결국 성묘를 소홀히 하는 나를 꾸짖는 종형의 소릴 들어야 할밖에. 둘의 사이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종형은 나를 말로써 응징했고 나는 종형을 원망할밖에.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나는 가끔 아내를 채근해 산소에 다녀오곤 하였다. 아내도 초보 중의 초보였으니, 벼랑 끝으로 로 곤두박질칠까 봐 마음을 졸일 수밖에.

바람결에 들려오는 종형과 형수의 소리는 항상 이랬다. 교장까지 지낸 놈이 제 아버지 엄마 산소를 모른 척해? 제 아비 어미가 없었으면 제가 나기는 했어? 후자가 형수의 꾸지람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증오가 섞여 있다? 우린 항상 그런 의아심을 가졌다.

마침내 내 건강이 악화되어 문 밖이 바로 저승일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런 풍문은 줄어들지 않았다. 종형은 부산에서 사업을 해서 성공한 덕분에 좋은 승용차도 있었고, 고향에 집을 얻어 놓고 대추 농사를 지으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주 갈밖에.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밀양에서 양산으로 도로가 나는데, 엄마 아버지 산소를 이장해야 한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대자(代子)인 시몬에게 그 큰일을 잘 매듭지어 달라고 부탁할밖에. 50년 만에 엄마 아버지의 유골을 먼발치에서 봤다. 아내와 내가, 그리고 세 누나와 큰자형 등과 함께. 끝내 종형은 나타나지 않았으니, 나도 사람인지라 부아도 났다. 대신 이제 산소 때문에 설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젖었다.

밀양 성당에서 다시 화장으로 약식인 예식을 치르고 곧바로 성당 천상낙원에 봉안하게 되었으니,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아내와 나는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1촌인 님(임)을 잃는 크나큰 충격과 맞부딪쳤으니 터져 나오느니 이 탄식뿐이었다. 오호 통재라!

부산에 머무를 수 없었다. 해서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들고 여기 왔다. 어느덧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여기에서 온갖 몸부림을 치다가 진정한 돌아갈 ‘귀(歸)’ 자 하나 달랑 가슴에 새기고, 상념에 젖어 있는 것이다.

종형. 원망도 많이 했고 미워도 했었다. 내 잘못을 반성하지 못하고 말이다. 살아서는 힘들었던 화해가 죽어서 이루어졌으니, 그걸 요약하려는 것이다. 바로 영천에서다.

용인에서 영천까지의 왕복은 엄두를 못 낼 정도다. 그런데 어느 날 이를 악물고 집을 나섰다. 신갈 5거리에서 동대구 행 버스를 타고 거기서 하차했다. 다시 영천 행 버스로 환승하여 터미널에 내린 뒤 택시를 이용하여 호국원까지 가는 데 총 대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호국원 입구에서부터 심장이 마구 두방망이질을 했다. 참, 둘째 자형도 거기 잠들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꽃다발 두 개를 사들고 봉안당으로 올라갔다.

안내실에 참 친절한 직원이 있었다. 종형과 자형의 이름을 들먹였더니 현장까지 안내해 주는 게 아닌가! 먼저 종형 봉안당부터 들렀다. 이현우 병장/ 1931.11.2. 경남 양산에서 출생/ 1914. 9. 18. 부산광역시에서 사망/ 형수와 한 공간에 유해가 들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바닥을 적셨다. 오랫동안 어깨를 들썩거리며….나를 향했던 종형의 애증(愛憎)! 그 빛과 그림자, 기나긴 역사가 한꺼번에 한바탕 꿈이 되어 나를 휩싸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기가 막히게도 자형의 봉안당도 같은 동(棟) 같은 층, 그것도 여남은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게 아닌가! 이계출 특무상사/ 1930. 11. 18. 경남 양산에서 출생/ 1912. 2. 10. 대구광역시에서 사망/1950 화랑무공훈장 수훈. 옆 공간은 비어 있었다. 누나가 머지않아 들어갈 공간이다. 둘의 사이는 생전에 그렇게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나로 하여금 놀라 자빠지게도 하고 남을 기억 하나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되살아났으니….종형은 8사단 소속이었다.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었던 것이다. 비록 전공은 못 세웠을망정, 새로운 내 모부대(母部隊) 8사단 소속으로 그 옛날 적과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다니,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또 있겠는가? 그 8사단이 몇 번이나 위치를 옮기다가 마침내 양주시 백석동으로 와 거기 자리 잡은 지 오랜 26사단을 통합하여 새로운 이름 제8기계화보병사단이 된 지 1년여다. 죽어도 잊지 못하던 26사단은 기념관에 흔적으로 남아 있으니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엄마한테 가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 귀대하는 내게, 어두운 눈으로 작별하셨지요? 뒤돌아보지 말라시면서….그런데 세상에, 종형이 나와 같은 부대 소속이 되었습니다. 둘째 자형과 영천 호국원 같은 층에 있어요.” 놓칠 수 없는 얘기 하나. 여기 와서 이태 되었을 때, 엄마의 모습을 항상 떠올리다가 이런 생각을 불쑥 떠올렸던 것. 외할아버지 산소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고.

하지만 너무나 멀다. 청도 한재라는 데를 찾아야 하는데, 밀양으로 가서 완행열차를 타고 유천에서 두 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택시가 없단다. 그래도 나는 나섰다. 밀양 엄마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가 시내로 나와 일박을 하고 이튿날 가까이 사는 아내의 제자인 소방관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마침 비번이라 가능하단다. 그래서 실로 70년 만에 외할아버지 산소를 참배한 것이다. 엄마가 시집오기 전 살던 집은 당신의 열 한촌(寸) 조카가 살고 있었다. 나보다 한 달 늦은 그가 내게 한사코 하대를 하라고 조르는 바람에 혼이 났다. 끝내 얼버무려 버렸지만…. 그가 하던 말이다. 나이 많은 조카는 있어도 나이 많은 동생은 없다는.

옛날 외갓집은 부자였단다. 외할아버지가 말을 탈 때 오르내리던 널찍한 바위 하나가 대문 곁에 있었다. 시집오기 전날 밤, 눈 어두운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어 눈시울이 젖었다. 아버지도 한쪽 눈은 의안이었다. 장모도 그랬다. 참 마음 아픈 사연이다.

때로는 근래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대로 코로나에 꺾여 숨을 거둔다? 그래도 괜찮다. 다만 아직 미해결 상태인 몇 가지 숙제가 있다. 이미 20년 전에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 약속했던 장기 및 사체 기증은 쓸모가 없어서, 명동 성당을 통해 가톨릭대학교에까지 부탁하여 받아 놓았던 서류를 보내지 못하고 있으니….암 수술도 했고, 어깨 대 수술도 하는 동안에 경황이 없었다고 변명하려니 너무 입에 발린 소리 같아 부끄럽다. 장례 절차도 복잡한 모양이라 나를 방황의 늪으로 빠뜨린다. 이 위기만 넘기면 서둘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래도 나는 짐짓 여유를 부린다. 바로 스마트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데, 밤이면 밤마다 잠들기 전에 듣는 빗소리다. 어릴 때 엄마랑 누나랑 큰방에 누워 듣던 바로 그 소리다. 자랄 때도 들었고, 군에서도 들었으며, 결혼해서도 아내랑 아이들과 들었다. 다만 일흔을 넘길 때까지 몇 년간 그걸 몰랐다가, 지금에 와 그걸 깨달았다니 서글프지만, 뭐 대수인가?

오늘 밤도 베갯머리에서 흘러나오는 빗소리를 들으련다. 지난 삶을 송두리째 회억하면서 중얼거리기라도 해야지 않겠는가?

“곧 돌아가리라, 영원한 안식처 우리(Our) 유택(幽宅)으로. 빽빽할 밀(密), 볕 양(陽), 곧 밀양(密陽)에 자리 잡은….거기는 남쪽 지방이지만, 결코 내려가는 게 아니다. 나에게는 상(上)의 개념이 존재하는 곳이니, 나 고개를 들고 올라가야지.”

다행히 성한 몸으로 몇 달 안에 엄마 아버지 봉안당에 간다면, 불자였던 두 분을 위해 ‘찬불가’ 한 곡은 불러야 한다. 여느 때처럼 말이다. 나옹선사 작사, 변규택 작곡. 󰁖청산은 나를 보고’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