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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세이] 나는 훔치거나 모방한다.
작성자 유중원
작성일 2022-05-04 12:20:07
조회수 42

나는 훔치거나 모방한다.

 

1. 나는 훔치거나 모방한다.

어떤 작가도 무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 누가 무에서 창조를 이루어냈을까. 그들은 무에서 작품을 창조한 조물주란 말인가. 우리가 쓰는 언어를 누가 발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는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모방하고, 가끔 훔칠 뿐이다. 나의 언어 속에는 남모르게 훔친 남의 글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거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익명의, 이름 있는 이야기꾼, 작가들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똑같은 형식과 내용, 재료, 주제를 가지고 소설을 우려먹었으니, 단언컨대 새로운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변형이고, 변주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졌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미 3,000여 년 전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치고 모방을 하며 배운다. 내가 무슨 탁월한 상상력이나 번뜩이는 영감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모방. 모방의 모방. 절도. 모조품. 반복. 위선. 위악. 진부함. 클리셰 Cliché.

그런데 모방과 절도의 가장 고귀한 형태인 표절의 한계는?

상호 텍스트 (intertext) 또는 상호 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이란?

최근 문학이론가들은 그걸 상호텍스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한껏 미화시키고 있다. 그들은 애써 표절의 문제점을 외면한 채로 모방 또는 영감이라고 하였다. 모든 작품은 다른 많은 작품들과의 연결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작품은 그것이 선택하고 반복하고 변형하여 도전하는 이전의 작품들에 의해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립 솔레르스는, ‘모든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의 접점에 위치한다. 모든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의 다시 읽기이자 강조이자 한데 엉겨 굳어짐이자 이동이자 깊이이다.’이라 말했고, 엘렌 모렐앵다르는 모든 텍스트는 인용들을 쌓아올려 만든 것이고,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시킨 살아있는 글이다. 글쓰기란 다시쓰기다.’라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고,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서는 변용과 증식이 일어난다.

바르트는 문학에 있어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어쩌면 문학 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저작권 개념을 원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 주로 누구로부터 모방을 하고 배우고 있는가.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무작정 읽었으니까 널리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별히 누구로부터라고 의식하지는 못 한다. 그러나 작가가 지독하게 읽지 않으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수천 권의 책 (그 책들은 우선 소설에서부터 역사, 철학, 문학, 법학, 생물학, 동물학, 천문학, 지리, 여행기, 기타 잡서 등등 수십 종에 달하지만)을 읽고 또 읽었고, 지금도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책을 읽고 있으니,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경우를 어떻게 기억할 수 없다.

나는 호르헤스가 말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아라비안나이트에서 1001개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세헤라자데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참으로 애매하고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 일도 그렇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기억은 변경, 왜곡, 조작된다.

다만 그들 책들로부터 무슨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책들의 의미와 내용이 내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스며들어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온 얼마 되지도 않은 내 작품들에는 소위 말하는 메타 텍스트적 또는 상호 텍스트적 요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들어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야할 것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 속에서, 독자 속에서, 작가 속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의 몫인 해석을 스스로 하고 그것을 끝까지 해체한다. 그것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실재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개별적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장편소설 사하라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여러 부분이 중·단편 소설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소설 간에는 종속관계 또는 차용관계는 성립되지 않으며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그렇다고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고심 끝에 의도한 바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자료와 주석을 참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내가 구축한 세계를 더욱더 확장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담론 (장편에서는 불가피하게 매몰될 수밖에 없는 작은 주제들인)을 부각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되풀이 되는 특정한 인물과 주제. 주제가 반복되고 주인공의 목소리가 누적되면 하나의 총체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전혀 근거가 없고 개념 정리가 안 된 해괴망측한 용어인 자기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자기 표절의 원조는 다름 아닌 신 자신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이야기의 뒤에는 그 인물들의 또 다른 삶이 있다. 그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소위 후일담, 그 후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지루하게 내세우면 그건 촌스럽고 오만하고 진부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예술가여! 창작은 하되 말하지는 말라!’ 라는 금언을 되새겨야 하리라. 그러나 이는 유명작가에게나 해당하는 일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나 같은 무명에게는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2. 사하라에 대한 단상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읽지도 않고, 비평도 해주지 않는) 사하라

사하라에서 김규현 (金圭賢)은 투아레그족 청년 이브라함 (Ibraham)과 함께 사하라 사막 남쪽을 여행하던 중, 고물 자동차가 고장 나고 사막 속의 사막에 갇히면서 목이 말라 갈증 때문에 죽는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사막에 완전히 매혹되어 사막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사막에서 목말라서 갈증으로 죽어야 했지만,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결코 사막에 완전히 매료된 바도 없고 더욱이 사막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순진한 독자들 몇몇은 자주 그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오인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설의 화자와 작중 인물의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는 배우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배우처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배역과 다른 인간성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상상적 세계인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하고 싶은 독자의 정당한 욕망을 이해한다. 작가와 소설의 주인공이 미분화된 고백 형식의 사소설, 1인칭 소설이 한 때 (일본의 초기 자연주의 문학 시절) 일본 소설의 전통이 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실재하는 인물이거나 어떤 인물의 모방이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구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 왜 그는 모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일찍 죽어야만 했는가. 이게 이 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기하는 진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는 온갖 죄악과 부조리, 고통과 고난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사악한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인간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무구한 사람이 크나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정의로운 인간이 사악한 인간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횡행하고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는가. 정말 위대한 유일신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적 계시론은 때가 온다.’, 악의 시대가 거의 끝나간다고 강조했다. ‘회개하라, 복음을 철썩 같이 믿어라.’ 그리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어떤 고통도 없고 가난도 없는, 진리와 정의, 평화만 있는 유토피아,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0년이 넘게 기다렸지만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으니 독실한 범신론자인 내가 유일신을 믿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이 세상에는 악과 선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고 악의 세력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믿는다. 악은 필요악이고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은 말한다. “소설이 쓸데없이 어려워요. 그래서 몇 장 넘기다 읽기를 포기했지요.”, “소설에 깊이가 있기는 해요.”, “소설이 너무 재미없어요. 재미가 없으면 소설이 아니지요(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지루함이란? 왜 소설이 꼭 재미있어야 할 책무라도 있다는 말인가? 왜 소설이 난해하고 불투명하고 지리멸렬하면 안 되는가.), “김규현이 누구예요.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실제 인물이 맞나요.”, “그런데 사하라에는 몇 번이나 다녀왔지요?”

(이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밖에. 내가 가기는 했었던가……? 그러면 몇 번이나……? 아니면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던가? 그게 진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이 그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더 주의 깊게 끝까지 읽어보세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바쁜 그들이 그걸 왜 읽겠는가. 수긍이 간다. (그러니까 폴 오스터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글쓰기를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스탕달은 1822년에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연애론을 출간했지만 그 당시에는 11년 동안 단 17권 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때 출간 당시 스탕달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 책의 평판이 어떤지, 출판사에 넌지시 물어 보았다. 출판사 영업 직원이 대답했다. “그것은 신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도 집어 들거나 펴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하라는 지금 신성한 책이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일단 책을 발표하고 나면 그 작품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고 세상으로 나간 책은 자신만의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자부심과 자포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그 책도 가냘픈 생명력으로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소설을 다시 읽기가 민망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붙잡고 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내게는 너무 중요하다. (나는 그걸 쓰기 위해서 100권이 넘는 참고 문헌을 읽고 또 읽었고, 5,000매의 사진을 검토했고, 300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았고, 9년 동안이나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쳤으니까.)

 

 

소설의 배경을 바라볼 때 대가는 그것을 단지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은 피하는 법이어서 사실 그대로 그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만을 전달하려고 한다는데, 나는 대가는커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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