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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황충상 소설집 <사람본전>을 읽고
작성자 곽정효
작성일 2021-05-25 22:11:33
조회수 78

황충상 소설집 <사람본전>을 읽고

곽정효

 

 

지금 내가 소설을 읽었나? 아닌 것도 같고 맞는 것도 같다. 어쩌면 소설과 명상이 만나는 물머리에 서 있는 것도 같다. 우리 문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설들이다. 종교적 색체가 강하면서 주제도 소재도 문체도 독특하다.

특히 눈이 가는 두 작품이 있었다. <그림자껍질><사람본전>이다.

<그림자껍질>은 그림자껍질이라는 제목부터가 특이하고 생소하다. 화두를 던지며 소설을 시작하는 셈이다. 나는 H신문사 프리랜서 기자로서 검도계의 신화적인 존재, 범사를 대담 취재하는 기회를 얻는다.

범사는 검의 순수정점의 길을 열어 그림자껍질을 벗기자면 빛과 그림자의 층위를 만지는 나름의 대화명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한 벌 벗기자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묻자 그림자껍질을 벗겨내는 공정이 예삿일이 아니며 마음먹기의 일이라고 답하는데 꼭 글쓰기의 과정을 말하는 듯 들리기도 한다. 그림자껍질을 벗기자면 우선 빛과 그림자의 경계를 찾아 칼끝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에서도 역시 작가의 입장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범사는 그림자껍질을 벗겨 죽은 아내에게 선물할 것이라 해놓고는 기자가 돌아간 후 홀로 중얼거린다. 이 소설은 줄거리에 의미를 두고 읽을 작품은 아니다. 명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만큼 범사의 고백을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 내 몸뚱이의 본래 형상을 보려는 작업을 죽은 아내를 팔아 방편 삼은 것 참 미안한 일이오. 그림자껍질의 형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믿기지 않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빗대는 경우를 이해하소. 악의는 전혀 없소. 사람은 누구나 더 젊어 보이려고 참 못할 짓들을 하잖소. 따지고 들면 내가 그림자껍질을 벗기는 까닭도 그와 비슷한 일일 거요. 빛의 길을 점검하면서 노쇠한 몸을 단련하자는 것이니더 첨언하자면 그림자에게 검이 들고 나는 길을 알려 껍질을 손상 없이 벗기는 자기 검술의 점검이라오. 내게서 비롯된 영검팔체 도법 影劍八體 道法의 점검인 셈이지요. 그러니 내 이 그림자껍질 벗기는 작업은 전혀 기이할 것이 없어요. 세상일에서 비켜나 자신의 내적인 일에 비의적으로 진지하달 뿐 그 이상의 뜻은 빛과 그림자가 알 뿐이라오. 아무튼 그림자껍질은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어요.

그의 고백은 이어진다.

- 나는 나를 속여야 산다. 때로는 속고 속이는 것이 진리이기도 하다. 생각이 마음에 꽂히면 그림자는 한 겹 옷을 덧입는다. 그렇기에 그림자 껍질은 수천만 겹의 옷 입음이 된다. 그런데도 한 겹의 옷으로만 보인다. 흰 옷이 검은 옷에서 나오고 검은 옷이 흰옷에서 나왔다는 이치가 그것이다. 빛과 그림자는 이렇듯 억 겹이면서 홑겹인 원형질의 옷 이야기가 된다.

범사의 고백에는 인생의 진수가 담겨 있다. 소금의 비유를 떠올려 본다. 소금의 맛만을 취할 수는 없다, 소금에 무게를 입혀야 그 존재가 드러나고 주고받을 수 있듯이 그림자 껍질은 일련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벗길 수도 입을 수도 없고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없다. 당연히 주고받을 수도 없다. 그건 곧 마음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은 원래 자체가 없는 것인데, 4대가 화합하여 형상을 이루었으니 사실은 헛것이며, 육근과 사대가 안팎으로 합하여 이루어졌는데 반연하는 기운이 허망하게 그 안에 모이고 쌓여 반연하는 것이 있는 듯한 것을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림자껍질은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옷처럼 입고 벗을 수 있다는 범사의 말은 모이고 흩어지는 사대의 형상과 반연하는 것들의 층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도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범사는 당신의 꿈속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고 아내를 소개한다. 여인의 팔에 들려있다는 그림자껍질을 나는 보지 못한다. 범사의 말대로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운 후에야 투명한 그림자껍질을 본다. 사람 속을 걸림 없이 통과하는 그림자껍질, 그의 그림자껍질을 입고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자유를 느낀다.

그림자껍질에 대한 범사의 기사는 대박이었다. SNS에 오르고 공상과 과학이 접목된 특별 대담이라는 찬사의 댓글이 폭주한다. 그러나 문제도 발생한다. 범사는 검도인이 달인이라 불리기까지는 악과 선의 그림자껍질을 벗겨내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물인 두 벌의 그림자껍질을 주는데 아내가 준 것이 선의 그림자껍질인지 내가 준 그림자껍질이 악의 그림자껍질인지는 입어보면 구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할 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라쌍수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부분이다. 지상세계란 상주常住와 무상無常, 진아眞我와 무아無我가 쌍으로 함께 하는 곳 아니던가. 진짜와 가짜, 좋은 것과 나쁜 것,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처럼 서로 반하는 것들이, 세상일이란 다 그렇게 쌍으로 있는 법, 선과 악이 공존하는 법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고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복선이기도 하다.

나는 범사의 그림자껍질을 입고 SNS에 글을 올린 여자를 만나러 간다. 그녀가 바로 범사의 유일한 제자 영기였다. 영기는 다시 범사에게 돌아와 수련한다. 드디어 범사는 영검팔체 도법 影劍八體 道法을 전수 승계한다.

소설의 시작은 도와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음양의 몸과 마음의 이야기이면서 조화의 힘, 생의 기운을 일깨우고 있다.

부처님의 열반을 지켜 본 사라쌍수도 역시 선과 악의 공존을 넘어 조화를 강조하고 생의 기운을 밝히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본전>의 나는 사람에게 참 자유는 죽음을 건너는 죽음으로 생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이다, 라는 말에 깊이 천착하게 되고 계획을 세운다. 미수米壽의 어느 날 곡기를 끊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 그 결기의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 팔십에 집을 나선다. 미리 마련한 농가 주택으로 내려가 계곡 자락의 300평 땅에 도량을 구상하는 명상에 잠겨 나날을 보내는데 발이 말을 걸어온다. - 나를 씻는 집을 지어요, 라고. 발이 나다, 그러니 발 씻는 집을 지으라는 거지, 누구나 와서 발을 씻는 집을- 나는 도량으로 구상한 건물을 짓는다. 미수 米壽를 맞는다. 죽으러 와서 이런 일을 해내다니, 108평 대지에 담을 치고 중앙에 28평 발 씻는 집을 지었다.

내 속에 사람본전 과 부처 본존本尊이 있다. 명상은 마음을 다잡는다. 모미의 죽음, 영혼혼례, 인왕산 미륵부처의 도량, 사미승적에 오른 일유년의 회억은 명상하는 근기를 위해 무의식 속에 불을 밝히리라 마음먹는다.

발 씻는 집에 예수도 오고 부처도 올까. 발 씻는 집의 화두가 분명해진다. ‘발이 마음이다가 화두다. 초기 경전에 보면 부처님을 눈뜬 사람, 지혜의 눈이 열린 분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양족존이라고 한다. 두 발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라는 뜻이다.

명상이 알 수 없는 깊이에 이르면 거기서 마음은 발을 보고 발은 마음을 본다. 발 가는 곳에 마음 가고, 마음 가는 곳에 발이 있다. 화두는 행으로 깨닫는 길을 연다. 마음은 둥근 것이다. 그래서 바른 원을 마음에 그릴 줄 알면 마음을 바로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발은 생을 짊어지고 선한 곳, 악한 곳을 걷고 걷다가 죽음에게 가서 그 생을 부려 놓기까지 원형의 길을 완주한다. 그리고 마음에게 감사하는 발은 마침내 마음마저도 벗어나 순전한 동그라미가 된다. 이것이 발이 마음이다의 어눌한 지론이다, 라고 밝힌다. 화두가 번쩍 빛을 발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본전의 지론을 곰곰 되새기면서 읽다보면 냇물 가운데 징검다리가 될 돌을 던져 놓듯 흐르는 상념 곳곳에 꼭 짚고 가야 할 생각들을 마련해 두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독자는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작가가 열어 보이는 세계는 현실에서 발을 떼어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어야 볼 수 있는 세계라고. 또 내공의 힘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소설이라고.

- 발이 마음이다. 이 화두는 석가가 스승의 부재에 울다가 지친 제자들이 안타까워 관 밖으로 두 발바닥을 내 보였다는 경전의 말씀을 상기 시킨다.

예수도 석가의 깨우침과 진배없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발이 마음임을 알게 했다.

사람본전이라 함은 사람의 본디 값을 말하는데 그 뜻은 넓고 깊다. 그 의미는 신과 사람을 잇는다. 나아가 사람본존이라 하여 사람 속 부처를 일깨운다. 본존이다 함은 사람을 공대하는 말로, 곧 사람이 부처라는 뜻이다. 명상은 날이 갈수록 밝고 맑아졌다. 나는 나를 사람본전이라 불렀다.

춘다는 생전의 사람 본전과 서약한 약속을 지켜 사람본전 반가부좌상 테라코타 <명상의 열반>으로 완성한다.

춘다에게 그의 뒤를 이어 2대 명상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명상은 생명을 낳고 생명은 죽음을 낳고 명상은 명상을 낳아 명상이 춘다에게 답을 말하게 했다. 앞으로 33년 봄을 맞아 발을 씻고 씻으면 춘다의 발은 제 2대 명상인의 마음이 된다고.

이 물음은 춘다에게만 떨어지는 물음이 아니다. 죽음을 건너가는 죽음을 꿈꾸는 명상인들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이미 독자들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자리 잡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본디 종교란 말 그대로 인간 정신의 마루에 해당하는 가르침 아니던가. 게다가 치열한 자기 탐구와 종교적 수행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난해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사유의 세계를 넓혀주는 공은 어느 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한국소설의 지평을 넓혀 주는 공도 작지 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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